일상 이야기

홍범도 장군에 대해 알아보는 빠른 요약

JNT 2021. 8. 17. 18:17

홍범도 장군 요약

2021년 8월 15일 저녁, 서울공항에 도착한 홍범도 장군님의 유해가 봉환식을 마친 뒤 대전현충원에 도착하여 현충관 임시안치소에 안치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잠드신지 78년만에 고국으로 귀환되었다. 홍범도 장군님은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를 통해 많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홍범도 장군님의 유해 귀환을 기념하며 업적에 대해 요약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 홍범도 장군이 되시기까지

홍범도는 1868년(고종 5) 8월 27일 평양에서 태어나셨고 호는 여천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셨으며,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다.

함경도에서 호랑이 포수로 이름을 날리셨다고 한다.

사격솜씨 때문에 '날으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1907년 일제가 총포와 화약류 단속법을 시행하며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였고,

이에 반발해 항일의병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23&aid=0003633372

 

● 봉오동 전투

https://blog.naver.com/hoban-jsh/221573586434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0년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전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최고 지휘관으로서 일본 정규군을 격퇴한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끌고있던 독립군의 연합부대가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봉오동 산지에 매복을 하고 있다가 3면에서 포위 후 공격하여 대승을 이끈 전투이다.

독립신문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 결과 일본군은 전사자 157명, 부상자 300여명이었으며,

독립군은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 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봉오동 전투는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최초로 본격적으로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승리를 거두면서 독립군의 사기가 드높아졌으며 독립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이 한층 높아져 그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봉오동 전투 이후 독립 전쟁을 위한 독립군의 통합과 군비 확충 또한 활발히 추진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홍범도 장군은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큰 업적을 세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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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도 장군

청산리 대첩 이후, 1921년 러시아령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하였다.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쓰셨으나,

같은 해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겪은 뒤 이르크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1937년 또 다시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었다.

강제 이주된 뒤에는 그 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 등으로 일하시다가 독립을 2년 앞둔채 1943년 76세로 별세하셨다.

독립운동을 이끄셨던 장군의 마지막이 너무 쓸쓸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 홍범도 장군의 유해 귀환

홍범도 장군이 별세하신지 오랫동안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셨다.

지금까지 한국으로 빨리 귀환되지 못했던 것에는 카자흐스탄이 남북 모두와 수교한 국가였기 때문에 외교적인 이슈가 있었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의 고향은 평양이고 북한 또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구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고려가 필요했던 것 같다.

2017년부터 신북방정책으로 양국 교역과 관계 활성화되었고, 신뢰가 쌓이면서 유해 봉환이 정상회담 의제로 포함되었다.

그 결과, 2021년 08월 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잠든지 78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으며,

2021년 08월 17일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가 서훈되었다.

2021년 0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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